주제 기사 13화 로댕 ‘지옥의 문’은(는) 인터넷에서 저희가 편집했습니다.
[그 그림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나-13]
인간의 내면에 대한 통렬한 성찰
로댕의 작품은 너무도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The Thinker’(1879-1889), ‘The Kiss’(1889), ‘The Shade’(1880-1881) 등은 개별 작품으로 로댕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지만 원래는 ‘The Gate of Hell(지옥의 문)’에 포함되는 186개의 인물 조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Museum of Decorative Arts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의뢰된 ‘The Gate of Hell’은 결국 박물관 건립이 무산되면서 갈 곳을 잃게 되었지만 로댕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을 계속해서 완성해가는 동시에 이 작품에서 독립된 인물 조각을 분리시켜 제작하기도 했다.
‘The Thinker’는 ‘지옥의 문’의 정중앙 테두리에 위치한 조각상으로 고심하고 있는 표정이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로 해석되거나 ‘지옥의 문’의 모티브가 된 ‘신곡’을 쓴 단테, 또는 로댕 자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로댕이 추구한 인간의 보편성으로 인해 이 조각은 특정인을 떠나 인간 누구나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죄에 대한 고찰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삶 자체가 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는 어렵고 괴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죄를 낳는 인간의 욕망과 죄로 인한 인간의 고통, 이에 대한 인간의 고뇌는 모두 내면에서 나오는 것으로 단순히 표면적인 외적 형태의 표현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로댕은 조각을 통해 바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고 따라서 그의 조각은 아름답기 보다는 통렬했다.
아카데미의 기준 대신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문제작들의 출현
그의 조각이 흠없이 매끄럽고 이상적이며 이야기와 상징으로 전형성을 띠는 인물 조각이 될 수 없었기에 아카데미와 평단은 그의 조각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로댕이 파리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작품인 ‘The Age of Bronze’(1877)는 영웅적인 면모나 이상적인 형상이 아닌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과 더불어 실사의 사이즈로 인해 심지어 사람(시체)의 모습을 본 따 만들어졌다는 루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로댕은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모델의 사진과 모델을 본 떠 만든 몰드(mould)를 제출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어차피 이를 검증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St. John the Baptist Preaching’는 스튜디오를 자유롭게 오가는 모델들의 동작을 포착해 조각하는 로댕의 작업 스타일이 묻어난 작품으로 시간과 움직임을 인간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었다. 걷고 있는 동작이지만 두 발을 바닥에 단단히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이나 팔을 부자연스럽게 뒤틀고 있는 모습에서 자연스러움보다는 과장되고 독특한 형태가 두드러진다. ‘The Age of Bronze’와 ‘St. John the Baptist Preaching’로 시작된 인간 형태를 통한 내면의 형상화는 로댕에게 있어 평생의 탐구 과제였다.
기존의 조각들이 서있는 모습은 콘트라포스토(한쪽 다리에 무게를 두고 서 있는 모습)로 표현된다든지, 패전병의 모습은 주로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든지, 대부분 가만히 서있거나 또는 앉아있는 정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든지 하는 전형적인 모습들과는 동떨어진 로댕의 인물 표현은 그의 지나친 실험정신으로 인해 전통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당시 사실주의로 회화에서 파동을 일으키던 쿠르베나 아카데미즘에 반발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던 인상주의 화가, 또한 이들을 지지하던 몇몇 평론가들의 지지를 얻었고 나아가 그의 스타일에 호의적인 정부 관료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로댕의 명성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 인간에게서 비롯된 지옥을 보여주다
이러한 계기로 Museum of Decorative Arts의 정문을 의뢰받기에 이르렀고 작품의 주제는 전적으로 로댕에게 일임되었다. 본격적으로 실험정신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부분에서 영감을 받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지베르니의 ‘천국의 문’에 대응하는 ‘지옥의 문’을 제작한다.
처음에는 성경에서 따온 장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지베르니의 ‘천국의 문’과 같이 초안을 그렸지만 이내 다양한 몸 동작의 인물들이 어지럽게 배치된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마치 용암이 흘러넘치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당시 루브르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노예 시리즈인 ‘The Captives’ 조각 중 ‘Bound Slave’와 ‘Rebellious Slave’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로댕은 돌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했음에 분명하다.
죄를 부르는 욕망에 휩싸인 인간과 그로 인해 결국 파멸에 이르러 고통받는 인간은 모두 원초적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내면에서 솟구친 욕망에 굴복한 인간과 그로 인한 대가로 괴로워 몸부림치는 인간은 모두 절실하다. 그들의 원초적이고 절실한 몸짓은 근육 하나하나로 살아나고 몸통은 물론 사지와 손가락, 발가락, 심지어 머리칼에도 그 형태가 나타난다.
세계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지옥의 문
그의 조각에서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감지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성찰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너무도 보편적인 주제를 너무도 통렬하게 표현했기에 그의 조각은 육체만이 아닌 정신까지, 인간 그 자체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로댕은 자신의 말년에 모든 작품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 정부에 넘기고 자신의 스튜디오 자체를 뮤지엄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다. 로댕은 특히 청동으로 캐스트하는 작품을 좋아했던 까닭에 그의 작품은 원작은 물론 청동으로 캐스트된 작품까지 포함하여 여러 개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물론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생각해 프랑스 정부는 로댕의 작품이 최대 12번까지만 캐스트되도록 제한했다.
‘지옥의 문’의 경우 프랑스(루브르, 로댕뮤지엄), 스위스, 일본, 미국(로댕뮤지엄, 스탠포드대학), 멕시코, 그리고 한국(플라토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2016는 폐관 이후 호암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등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곳에 있든 로댕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으며 로댕의 작품을, 그것도 대표작을, 한 곳만이 아닌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분명 행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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