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기사 【그리스 기행】9. 헬리오스 거상과 기사의 섬 로도스Rodos은(는) 인터넷에서 저희가 편집했습니다.
도데카네스 군도와 로도스, 독일 위키피디아
레반트 지역, 독일 위키피디아
레반트 해의 위치, 황색으로 표시한 곳이 레반트 해이다,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섬의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 독일 위키피디아
BC 4세기 경의 공성탑 모형, 데살로니키 기술 박물관,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헬리오스 거상, Sidney Barclay, 1880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Friedrich Justin Bertuch.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삽화, 1806(맨 위가 ‘로도스의 헬리오스 거상’, 아래 왼쪽이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제우스 좌상’, 오른쪽이 소아시아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카우노스에서 주조된 드라크마 동전 앞면에 새겨진 헬리오스 얼굴, 독일 위키피디아
카우노스에서 주조된 드라크마 동전 뒷면에 새겨진 장미꽃,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깃발,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인장, 영어 위키피디아
BC 188년 로마제국과 셀레우코스 왕국 사이에 맺어진 아파메이아Apameia조약 이후의 소아시아 지도(초록색 부분이 로도스 팔라이아이), 영어 위키피디아
라오코온 군상, 영어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 독일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폴리페모스의 눈에 끝이 뾰족한 올리브 나무를 찔러 넣는 오디세우스 일행)), 독일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오디세우스의 뒷모습), 독일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오디세우스의 얼굴), 독일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와인 자루를 들고 있는 자), 독일 위키피디아
스페르롱가 군상 중 폴리페모스 군상(와인 자루를 들고 있는 자), 독일 위키피디아
폴리페모스 군상 중 스킬라와 카립디스 군상, 독일 위키피디아
1480년 로도스 포위공격, Guillaume Caoursin, 1483년 경
1522년 로도스 포위 공격, Fethullah Çelebi Arifi, 1558
로도스의 구호 기사단이 궁전에서 쏘던 대포,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쉴레이만 모스크,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쉴레이만 모스크,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쉴레이만 모스크, 독일 위키피디아
엘라포스Elafos(수사슴)와 엘라피나Elafina(암사슴) 상, 독일 위키피디아
총독 관저Palazzo del Governatore(현재는 도데카네스 도청),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만드라키Mandraki 항 네아 아고라Nea Agora 시장 입구,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Rodos/Ρόδος’는 길이가 78km, 폭은 38km로 그리스의 에게 해 남동쪽에 있는 도데카네스Dodekanes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이자 그리스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또한 섬이 아주 많은 에게 해와 섬이 거의 없는 레반트 해Levantine Sea의 경계선에 있다. 레반트Levant는 ‘떠오르다’라는 뜻의 라틴어 ‘levare’에서 유래한 말로 보통 ‘일출’ 혹은 ‘동방’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지리학적으로는 지중해 동부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레반트는 넓은 의미로는 그리스와 에게해의 섬을 비롯하여 터키, 사이프러스, 레바논,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좁은 의미로는 지중해 동부 해안과 그 뒤에 있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터키 남부의 하타이Hatay 주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레반트 해는 북서쪽으로는 에게해, 북쪽으로는 터키 해안,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가자지구, 서쪽으로는 리비아해와 맞닿아 있는 바다를 말한다.
로도스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e로부터는 430km나 떨어져 있지만 터키의 남서쪽 해안으로부터는 17,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로도스 섬과 이름이 똑같은 로도스 시에 살고 있다. 섬의 상징은 로도스의 만드라키Mandraki 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엘라포스Elafos라고 부르는 수사슴 상이다. 엘라피나Elafina라는 암사슴 상도 엘라포스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로도스’라는 이름은 보통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어로 ‘장미’라는 뜻의 ‘로돈Rodon/Ρόδον’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페니키아어로 ‘석류’라는 뜻의 ‘로디아Rodia/Ροδιά’에서 유래한 것이다. 혹자는 중세에 로도스 섬에 뱀이 우글거린 것을 근거로 그 이름이 페니키아어로 ‘뱀’을 뜻하는 ‘Εροδ/Erod’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서학자들은 로도스가 창세기에 나오는 야완Javan의 아들 도다님Dodanim의 고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도다님은 ‘로다님Rodanim’이라고도 했으며 그리스어로는 ‘로디오이Ρόδιοι’라고 했기 때문이다. Ρόδος를 알파벳으로 옮기면 Rodos이지만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그리스어 ό에 있는 기음氣音을 살려 R다음에 h를 넣어 각각 Rhodes와 Rhodos로 표기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로도스 섬은 바다에서 솟아난다. 어느 날 신들의 왕 제우스가 올림포스 신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 주겠다고 선포한다. 그러자 티탄신족의 태양신 헬리오스Helios가 자신이 지상을 여행하면서 본 가장 비옥한 땅을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제우스로부터 자신이 염두에 두었던 섬을 받은 뒤 그곳에 살고 있었던 매혹적인 요정 로데Rhode의 이름을 따라 로도스라고 부른다.
헬리오스는 얼마 후 로데를 아내로 맞이하여 헬리아다이Heliadai라고 총칭하는 일곱 명의 아들들을 낳는다. 이어 헬리오스의 아들들 중 큰 아들이 결혼하여 카메이로스Kameiros, 이알리소스Ialysos, 린도스Lindos 등 슬하에 세 아들을 둔다. 바로 이 세 아들은 그 후 로도스 섬에 각각 자신과 같은 이름의 세 도시를 세우고 그 시조가 된다.
로도스는 그리스 여타지역과 마찬가지로 관광객들로 붐비는 7, 8월 기온이 40°C,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차가운 바다 바람이 해안 기온을 28°C~32°C로 내려주기도 하며, 습도가 아주 낮고, 밤에는 기온이 23°C~20°C로 내려가기 때문에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참을 만하다. 가장 추운 1월과 2월의 낮과 밤의 평균 기온은 각각 12°C~18°C와 8°C~12°C이다. 서리는 거의 내리지 않지만 섬에서 가장 높은 아타비로스Attavyros산( 해발 1.215 m)에는 가끔 눈이 오기도 한다.
로도스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은 신석기 시대부터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주로 칼리티에스Kalythies 동굴 같은 곳에 거주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도스 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BC 2800~BC 2000)이다.
그 후 BC 20세기 초기에는 크레타의 미노스Minos인들이 로도스 섬에 들어와 BC 16세기경 트리안다Trianda 거주지를 조성하기도 한다. BC 16세기 초기에는 미케네Mykene인들이 로도스에 많은 무덤들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이곳을 식민지로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BC 11세기부터는 로도스에는 도리아Doria인들이 정착하여 후에 카이메로스, 이알리소스, 린도스 등 세 도시를 건설한다. 현재 린도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이때 그들이 세운 아테나Athena 신전의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로도스는 그리스에서 라반트Lavant로 가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놓여있다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일찍부터 무역이 발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한다. 로도스는 이를 기반으로 시칠리아와 소아시아의 카리아Karia에 각각 겔라Gela와 파셀리스Phaselis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로도스는 BC 8경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에서도 언급된다. 그에 따르면 로도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자 헤라클레스Herakles의 아들 틀레폴레모스Tlepolemos의 지휘아래 전함 아홉 척을 끌고 참전한다. BC 546년 소아시아의 리디아Lydia가 페르시아의 아카메네스Akamenes 왕조에게 정복당하면서 로도스는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로도스에 맨 처음 생겨났던 세 도시 카이메로스, 이알리소스, 린도스는 독립적인 도시국가로서 에게 해의 코스 Kos섬, 크니도스Knidos 섬,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 섬과 소위 ‘도리아 여섯 도시 동맹Doria Hexapolis’을 체결하여 수백 년 동안 우의를 다지며 살아온다.
BC 500년 밀레토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BC 494년 라데Lade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르시아에게 진압된다. 그러자 로도스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모든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 여파로 BC 490년 페르시아가 전쟁을 일으켜 아테네로 쳐들어오지만 BC 479년 플라타이아이Plataiai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철수한다. 페르시아군은 이즈음 로도스 섬을 점령하지만 BC 478년 아테네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섬에서 쫓겨난다.
로도스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지해서 아테네를 맹주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에 가입한다. BC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자 로도스는 BC 40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테네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유지한다.
BC 408년~BC 407년 델로스 섬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서로 독립적이었던 세 도시 카이메로스, 이알리소스, 린도스가 하나로 통합하여 오늘날의 로도스 시가 있는 섬의 북쪽 끝자락에 밀레토스 출신의 당대의 유명한 도시 건축가 히포다모스Hippodamos의 설계에 따라 새로운 도시 로도스를 건설함으로써 하나의 통일된 지배체제를 갖추기 때문이다.
로도스는 BC 4 세기로 접어들자 아테네를 능가하는 에게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맞은편 소아시아 해안에 소위 ‘로도스 페라이아Peraia/Περαία’를 건설한다. ‘페라이아’는 그리스어로 ‘맞은편에 있는 땅land across’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로도스 페라이아’를 자세하게 풀이하면 ‘맞은 편 소아시아에 있는 로도스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때 로도스는 페라이아에 있던 도시국가 카우노스Kaunos에서 앞면에는 태양신 헬리오스 신의의 얼굴을, 뒷면에는 장미꽃을 새긴 드라크마Drachma 동전을 주조하기도 한다. 현대의 로도스 시의 깃발이나 인장에도 바로 이 동전 앞면에 새겨진 헬리오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BC 357년 로도스는 소아시아 카리아Karia의 마우솔로스Mausolos 대왕에 의해 점령당하며, BC 340년부터는 잠시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가,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침으로써 그의 제국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바로 그 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소위 알렉산드로스의 디아도코이Diadochoi(후계자)라고 자칭하던 그의 휘하 장수들이 제국을 여러 개로 분할 통치한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카산드로스는 마케도이아를,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셀레우코스는 시리아를,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를 통치한다. 로도스는 그 중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강력한 동맹을 맺어 BC 3세기의 에게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쌍두마차를 이루며 상업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이때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를 넘나들며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사람들이 바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수사학자 아이스키네스Aischines와 디오니소스 트락스Dionysos Thrax, 로도스 출신의 서사시인 아폴로니오스Apollonios Rhodios, 소아시아 니카이아Nikaia와 로도스 출신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Hipparchos와 게미노스Geminos, 로도스 출신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Agesandros(혹은 Hagesandros) 등이다.
그중 아폴로니오스는 54명의 그리스 영웅들을 이끌고 흑해 연안의 콜키스로 황금양피를 찾아 나선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Iason의 활약을 그린 『아르고호의 모험Argonautika』을 쓴다. 아게산드로스는 아타나도로스Athanadoros와 폴리도로스Polydoros라는 다른 두 명의 로도스 출신의 조각가와 함께 대리석으로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소위 「라오코온Laokoon 군상」과 오디세우스Odysseus의 모험을 소재로 한 소위 「스페르롱가Sperlonga 군상」을 조각한다.
「스페르롱가’ 군상」은 로마에서 129km 떨어진 스페르롱가의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의 동굴 별장에서 발견된 조각 군상에 붙인 이름이다. 이 군상의 크게 두 개로 나뉜다. 하나는 오디세우스 일행이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os의 눈을 못 쓰게 하는 소위 ‘폴리페모스 군상’과 스킬라Skylla와 카립디스Charybdis 사이를 지나는 소위 ‘스킬라와 카립디스 군상’이다. 아게산드로스 등을 배출한 로도스 조각학교는 또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화려하고 극적인 미술 양식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이자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안티고노스Antigonos는 로도스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의 동맹이 자신의 왕국에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BC 305년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로도스를 공격하도록 명령한다. 데메트리우스는 높이가 55m나 되는 공성퇴(공성망치)와 무게가 163,293kg에 달하는 공성탑인 헬레폴리스Helepolis 등을 고안하여 1년 동안이나 공격하지만 로도스는 꿈쩍을 하지 않는다. ‘헬레폴리스’는 ‘도시의 탈취자’라는 뜻으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만든 인공 구조물이다.
그러는 사이 데메트리오스는 척후병으로부터 이집트 함선들이 원병을 가득 싣고 로도스를 향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BC 304년 어쩔 수 없이 로도스와 황급히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철수한다. 데메트리오스가 스스로 물러가자 로도스 인들은 섬의 수호신 헬리오스가 자신들을 지켜주었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적군들이 버리고 간 군수물자 등을 처분하여 헬리오스 신을 기리는 거상巨像을 하나 만든다. 소위 ‘로도스의 거상Kolossos Rhodios’으로 알려진 이 거상 프로젝트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의 제우스 좌상을 만든 천재 조각가 리시포스Lysiposs의 제자 카레스Chares가 맡는다.
카레스는 로도스의 만드라키Mandraki 항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15m 대리석 기단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톱니바퀴형 관을 쓴 33m 헬리오스 청동 거상을 세우기 시작하여, 이 거상은 착공한지 12년만인 BC 280년에야 비로소 완공된다. 이후 그 거상은 56년 동안 굳게 자기 자리를 지키다가 안타깝게도 BC 224년 로도스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헬리오스 거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크기나 조성방법이 신비한 베일에 휩싸이면서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등극한다. 그리스 신화와 연관된 또 다른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올림피아Olympia 제우스 신전의 제우스 좌상과 소아시아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BC 3세기 중반에 이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로도스와의 동맹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점 힘을 잃어가는 반면, 로도스는 도데카네스 군도에서 두 번째로 큰 카르파토스Karpathos을 비롯하여 인근의 많은 섬들과 주민들을 통합할 정도로 에게해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해상세력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로도스가 헬레니즘 시대에 최전성기를 구가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로도스가 당시 초강대국 로마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BC 188년 셀레우코스 제국과 벌인 전쟁에서 자신을 도와준 로도스에게 소아시아의 카리아와 리키아 지역을 할양한다.
BC 168년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Perseus 왕이 전쟁을 벌인다. 이때 로도스는 로마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며 양국을 중재하려다가 페르가모스Pergamos처럼 로마의 눈 밖에 난다. 일부 분노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로도스와 전쟁도 불사하려 하지만 무력이 아닌 경제적인 방법으로 로도스에 보복을 가하기로 결의한다.
그래서 BC 167년~BC 로마는 166년 델로스Delos에 장차 로도스를 대치할 자유무역항을 건설함으로써 로도스에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일찍이 로도스에게 선사했던 소아시아의 식민지도 거두어들인다. BC 164년 결국 로도스는 로마와 불평등 협약을 맺고 영영 독립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로도스는 그 후에도 한동안 함대뿐 아니라 그리스의 원거리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당분간 그대로 유지한다. 로마는 에게해에서 상시적으로 함대를 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도스 함대를 이용하여 에게해의 해상권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는 BC 155년~BC153년 로도스를 시켜 크레타의 해적들을 소탕한다.
BC 1세기가 되자 에게해 무역의 중심지가 로마가 의도한 바대로 델로스Delos로 이동하면서 로도스는 점점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인들이 로도스인들에게 등을 돌린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본 사람들 중 자신들보다 더 오만한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로도스는 로마의 내전기간인 BC 43년에는 카이사르에게 반란을 일으킨 카시우스Casius의 침공을 받아 약탈당한다.
하지만 로도스는 BC 43년~AD 74년에는 로마 귀족 가문의 문화와 교육의 메카로 변신하면서 수사학 학교와 조각가들을 양성하는 학교로 이름을 날린다. 또한 로마 정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망명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가 짧게 망명생활을 보내기도 한다.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도 이 시기에 잠시 로도스에 들러 기독교를 전파한다. 특히 AD 74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황제 대에 이르자 로도스는 소아시아의 리키아Lykia와 함께 로마제국에 정식으로 통합된다.
로마의 격언 중 로도스 섬을 무대로 만들어진 “hic Rhodus, hic salta!”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점프하라!Here is Rhodes, jump here”는 뜻으로 “말로만 떠벌리고 자랑하지 말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 말을 당장 검증해보라!”는 의미이다. 이 격언은 이솝 우화 중 “허풍쟁이 5종 경기(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레슬링, 달리기, 멀리뛰기) 선수”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이솝 우화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어떤 5종 경기 선수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 왔다. 그는 자신이 방문했던 여러 나라에서 해낸 대단한 일들을 큰 소리로 장황하게 떠들고 다니면서 고향 여기저기를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그 사람은 언젠가 로도스 섬에서 자신이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아주 멀리 점프를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증명해줄 목격자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어떤 구경꾼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정말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여기가 당신의 로도스입니다. 자 한 번 점프를 해보세요!’”
마르크스Marx는『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의 제 1장에서 이 격언을 라틴어로 인용하며 독일어 번역을 병기했는데 ‘로도스’를 ‘장미’로, ‘점프’를 ‘춤’으로 번역해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아마 로도스의 어원을 장미로 생각해서 그랬을 수 있지만 아주 독특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 그 목적이 너무 거대해서 모호하다면, 모든 방향전환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 상태들 자체가 “Hic Rhodus, hic salta!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고 외칠 때까지 놀라 늘 다시 움츠러든다.
Proletarische Revolutionen […] schrecken stets von neuem zurück vor der unbestimmten Ungeheuerlichkeit ihrer eigenen Zwecke, bis die Situation geschaffen ist, die jede Umkehr unmöglich macht, und die Verhältnisse selbst rufen Hic Rhodus, hic salta! Hier ist die Rose, hier tanze!
헤겔Hegel도『법철학 개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서문에서 마치 마르크스의 번역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 격언을 그와 똑 같이 번역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장미’는 문맥상 ‘이성Vernuft’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격언은 약간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을 춰라.’ Mit weniger Veränderung würde jene Redensart lauten: Hier ist die Rose, hier tanze.”
BC 395년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로도스는 동로마 제국에 편입된다. 동로마 제국은 후에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는데 간헐적으로 그 연속성이 끊기기도 하지만 1309년까지 그 명맥을 유지한다. 로도스는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는 동안 온갖 외침과 약탈에 시달린다.
653년에는 로도스 앞바다에서 아랍 함대가 처음으로 동로마 함대를 퇴치하고 로도스를 약탈한다. 672년에는 알렉산드리아가 로도스를 점령한다. 1124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제 35대 도제Doge 도메니코 미키엘Domenico Michiel이 1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여 이스라엘을 수복하고 귀환하면서 로도스를 비롯한 다른 비잔틴 제국에 속해있는 섬들을 약탈한다.
1204년 4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여러 나라로 나누어진다. 이 혼란기를 틈타 비잔틴의 부호 가발스Gabals 형제가 로도스를 수중에 넣는다. 1232년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한 비잔틴 제국의 일파인 니카이아 제국의 요한네스Johannes 3세가 로도스 섬을 수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다.
그는 급기야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가가 되는 Palaiologos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의 시조 안드로니코스Andronikos까지 보내 로도스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하지만 가발스 형제는 끈질기게 버티다가 1248년에야 비로소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 함대에 항복한다. 1250년 로도스는 다시 니케아 제국이 수복하여 1261년부터는 재건된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복귀한다.
1306년 에게해에 많은 영지를 갖고 있던 제노바 귀족 비그놀리Vignoli가 로도스도 지배할 욕심으로 본거지가 필요한 ‘예루살렘 성 요한 구호 기사단Order of Knights of the Hospital of Saint John of Jerusalem’(줄여서 성 요한 기사단Order of Saint John, 혹은 구호 기사단Order of Hospitallers으로 부른다)에게 로도스를 점령하도록 도와주면 섬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로마 교황도 때마침 구호 기사단에게 로도스를 하사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비그놀리의 음모에 힘을 실어준다. 그 후 구호 기사단은 무려 5년간의 공격 끝에 1310년 마침내 로도스를 접수한 뒤 섬에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 ‘구호 기사단 단장 궁전Palace of the Grand Master’등 많은 유럽식 중세 건물들을 짓는다. 이떄부터 로도스는’기사의 섬’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구호 기사단이 로도스에 세운 성벽과 요새는 그 뒤 이집트 술탄의 1444년 포위공격과 1480년 오스만 터키 메흐메트Mehmed 2세의 포위공격도 거뜬히 견뎌낸다. 하지만 1522년 쉴레이만Süleyman 1세의 포위 공격은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함락되고 만다. 이때 쉴레이만은 400척의 함선에 10만 명의 병사를 싣고 와 로도스를 공격한다.
이때 쉴레이만에 맞선 싸운 구호기사단의 단장이 바로 필립 빌리에 리슬 아담Philippe de Villiers de L’Isle-Adam이다. 그는 600여명의 기사와 4500여명의 여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포위당한지 6개월만인 1522년 12월 항복하고 만다. 바로 이 전투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소설 『로도스 공방전』의 소재이다.
구호 기사단 단장은 비록 싸움에서는 패배했지만 회교도들이나 기독교도들 모두 용감무쌍한 불굴의 전사로 존경을 받는다. 교황 하드리아누스Hadrianus 4세도 그를 믿음의 수호자로 천명한다. 쉴레이만도 섬을 정복한 후 전투에서 살아남은 구호 기사단이 자유롭게 시칠리아 왕궁으로 철수하도록 선처한다. 구호 기사단은 나중에 본거지를 시칠리아에서 다시 몰타로 옮긴다.
로도스는 쉴레이만에게 정복당한 뒤 1912년까지 390여 년 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는다. 쉴레이만은 로도스를 정복한 바로 이듬해 자신의 이름을 딴 쉴레이만 모스크Suleymaniye Mosque를 세우고 도시의 성벽 안에는 터키인과 유대인들만 살 수 있게 하고 그리스인들은 성벽밖에 살도록 명령한다.
1912년 5월 4일 이탈리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도스를 비롯한 도데카네스군도의 다른 섬들을 차지한다. 이탈리아는 로도스를 점령한 이후 로도스 시의 구시가지는 구호 기사단 시기의 양식으로 개조하고 신가지는 이탈리아식으로 현대화한다. 먼저 성벽 옆이나 성벽 위에 덧붙여진 이슬람 시기의 건물들을 모두 제거한다. 또한 기사단 단장 궁전을 확장하고 없어진 많은 건물들을 복원한다.
이때 지어진 건물이 바로 총독 관저Palazzo del Governatore와 네아 아고라Nea Agora시장이다. BC 3세기 로도스 항 입구 헬리오스 거상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섬의 새로운 상징으로 엘라포스와 엘라피나라는 사슴 한 쌍의 상을 세운 것도 바로 시기이다.
로도스는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1922년 그리스와 터키가 맺은 협정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것에 따르면 그리스에 있는 터키인은 터키로,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로도스에는 아직까지 터키 소수민족이 남아 있다.
1943년 무솔리니Mussolini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는 시칠리아의 카시빌리Cassibile에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자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이 주둔하고 있던 로도스를 비롯한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점령한다. 독일군은 로도스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 필레리모스Filerimos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부해안에 수많은 벙커를 만들며, 아르캉겔로스Archangelos와 린도스Lindos 사이에 공군 비행장을 건설한다.
로도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처음에는 독일군의 인종 차별정책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1944년 7월 13일 로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에게해 동부사령부 총사령관 울리히 클레만Ulrich Kleemann 장군이 갑자기 유대인 체포령을 내린다. 클레만은 당시 로도스에서 통용되고 있던 이탈리아 화폐 리라Lila의 가치가 너무 폭락하자 유대인들의 재산을 처분해서라도 턱없이 부족하게 된 주둔비용을 충당하려고 했다고 한다.
로도스에 사는 유대인들의 추방은 1944년 7월 24일 시작된다. 그들은 거주지역인 라 유데리아La Juderia를 떠나 배를 타고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서 1944년 8월 22일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다. 당시 로도스와 인근의 코스 섬에서는 각각 1,673명과 94명의 유대인들이 강제로 후송되다가 각각 54명과 6명이 탈출한다. 그래서 당시 로도스와 코스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각각 151명과 12명이다. 현재 로도스의 유대인은 60여 명이고 코스 섬은 두어 명밖에 없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로도스 섬은 연합군의 일원인 영국군의 군사 통치를 받다가 1947년 그리스에게 양도된다. 로도스의 신시가지로부터 3km 떨어진 구시가지의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언덕이 몬티 스미스Monte Smith로 불리는 것은 바로 그때의 유산이다. 몬티 스미스는 나폴레옹 군과 맞서 싸워 이긴 영국 해군 제독의 이름으로 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스미스William Sidney Smith(1764-1840)이다.
로도스 섬에서 고대의 유물로 볼만한 것들로는 우선 아크로폴리스의 아폴론 신전이다. 이 신전은 원래 ‘피티아Pythia의 아폴론 신전’이라고 불리는데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끝자락에 동서로 뻗어 있으며 현재 북동쪽 일부분이 복원되어 있는데 아크로폴리스의 랜드 마크로 여겨질 정도로 아름답다. 피티아는 원래 고대 ‘델피Delphi’의 아폴론 신전에서 아폴론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아 내리던 신녀 이름이지만 델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피티아의 아폴론이란 델피의 아폴론이라는 뜻이다.
아크로폴리스 북쪽 끝자락에는 제우스와 아테나 여신을 함께 모신 ‘제우스 폴리에우스Zeus Polieus’ 및 ‘아테나 폴리아스Athena Polias’ 신전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원래 로도스가 다른 도시국가들과 체결한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제우스 폴리에우스’와 ‘아테나 폴리아스’는 각각 ‘도시의 수호자 제우스’와 ‘도시의 수호자 아테나’라는 뜻이다.
또한 제우스 폴리에우스와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 동쪽으로는 열주인 스토아Stoa가 늘어서 있다. 로도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이밖에도 물의 요정들의 신전 님파이온Nymphaion과 아르테미스 신전인 아르테미시온Artemision, 운동장 스타디온Stadion, 대리석으로 만든 800석 규모의 음악당 오데온Odeion도 있다.
로도스에서 구호 기사단이 세운 성채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채는 둘레 곳곳에 해자가 파여 있고 총 4km에 달하며 주로 기사들의 출신에 따라 프랑스 성벽, 독일 성벽, 기사 성벽, 아라곤Aragon 성벽, 영국 성벽, 프로방스 성벽, 이탈리아 성벽, 카스티야Castilla 성벽 등 8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사도 바울 성문과 성 베드로 탑 등 수많은 성문과 탑들로 이루어져있다.
로도스 섬의 서쪽에는 초기에 세워진 세 도시 중 하나인 카메이로스Kameiros 유적지가 있으며, 그곳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구호 기사단이 성채를 쌓고 방어하던 우뚝 솟은 바위 요새가 하나 등장하는 데, 그것이 바로 ‘고독한 바위’라는 뜻을 지닌 ‘모노리토스Monolithos’이다. 그곳에는 한때 수도원이 있었지만 현재는 조그마한 교회가 들어서 있다.
로도스 남쪽의 린도스Lindos에도 아크로폴리스가 있는데, 이곳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덴마크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이 고대의 유적지 위에 성을 쌓았으며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그 위에 구호 기사단이 지은 성채이다. 그 성채 한가운데에는 BC 4세기에 지어진 아테나 신전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린도스에는 15세기에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판아기아Panagia 교회 혹은 마리아 교회도 있다. 마리아 교회는 특히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린도스 남쪽에는 사도 바울St. Paul이 로도스에 올 때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사도 바울의 이름을 딴 만灣이 있으며, 도시 외곽으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는 린도스의 참주였던 클레오불로스Kleoboulos의 무덤이 있다.
클레오불로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참주가 아니라 인자한 군주였으며 소위 고대 그리스의 7대 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그가 만들어낸 격언으로는 “많이 듣고. 많이 말하지 말라”, “아무것도 강제로 하지 말라”, “중용이 최선이다”, “민중의 반대자는 적으로 간주하라” 등이 있다.
린도스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콜림비아Kolymbia와 겐나디Gennadi 등 해변 휴양지를 지나 로도스 섬과 모래사장으로 연결된 프라소니시Prasonisi라는 조그만 반도를 만나게 된다. 프라소니시는 전체 면적이 3km²밖에 안 되는 바위언덕으로 바로 로도스의 최남단 땅끝 마을이다.
로도스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에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디아고라스Diagoras이다. 그의 출생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디아고라스는 메세니아인들이 스파르타에 대항해서 싸운 제 2차 메세니아 전쟁을 이끌었던 아리스토메네스Aristomenes의 손자로서 탁월한 권투선이다.
디아고라스는 BC 464년 올림피아 경기의 권투 우승자였으며, 이스트미아Isthmia 경기에서는 네 번, 피티아Pythia와 네메아Nemea 경기에서도 몇 번이나 우승한다. 특히 그의 딸 칼리파티라Kallipatira는 기혼여성으로 유일하게 올림피아 경기에서 권투 시합을 구경하는 영광을 누린다.
원래 기혼 여성은 올림피아 경기장에 입장할 수 없었으며, 만약 변장한 채 구경하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했지만 칼리파티라는 그래도 구경하고싶다고 청원한다. 그러자 권투 심판관들이 그녀의 아버지 디아고라스뿐 아니라 세 명의 남자형제 아쿠실라오스Akusilaos, 다마게토스Damagetos, 도리에우스Dorieus 그리고 두 아들 에우클레스Eukles, 페이시로도스Peisirrodos 등이 그동안 올림피아 경기에서 이루어낸 탁월한 업적을 고려해서 그녀에게만 경기를 구경하도록 허용한다.
현재 로도스에는 디아고라스Diagoras의 이름을 딴 Diagoras F.C 프로 축구팀이 있다. 로도스 시에서 14km 떨어진 국제 공항 이름도 디아고라스이다.『올림픽 2780년의 역사』(주디스 스와들리 지음, 김병화 옮김 효형출판, 2004)는 칼리파티라의 에피소드를 이와는 약간 다르게 전한다.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교관으로 위장하여 아들인 피시도로스를 올림피아에 데리고 와서 경기에 참가시켰다. 피시도로스는 우승했고 그 어머니는 흥분한 나머지 정체를 드러내버렸다. 하지만 당국은 모두 올림픽 우승자이던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아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녀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을 기하기 위해 그 이후로는 교관들도 등록하러 올 때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나체로 와야 한다는 조항을 통과시켰다.”
로도스 시의 위치,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 만드라키 항구 입구(엘라포스와 엘라피나 사슴 한 쌍이 보인다),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 만드라키 항구 입구(엘라포스와 엘라피나 사슴 한 쌍이 보인다),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만드라키 항구 입구(엘라포스와 엘라피나 사슴 한 쌍이 보인다),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만드라키 항(뒤로 네아 아고라 시장과 구호 기사단 궁전이 보인다),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시내의 시계탑,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아크로폴리스,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 아크로폴리스의 아폴론 신전,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시 아크로폴리스의 아폴론 신전, 영어 위키피디아
로도스 시 아크로폴리스의 음악당 오데온Odeon,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 시내 국립고고학 박물관 입구, 영어 위키피디아
웅크리고 있는 아프로디테상, 로도스 고고학 박물관, AD 1세기
웅크리고 있는 아프로디테상, 로도스 고고학 박물관, AD 1세기
로도스의 구호 기사단 성채,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구호 기사단 성채의 조감도, 독일 위키피디아
린도스의 사도 바울 교회, 독일 위키피디아
로도스의 땅끝 프라소니시Prasonisi 반도를 섬과 이어주는 모래 사장, 독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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